기생충 리뷰 초안
지난 목요일 개봉 때 본 것을, 지금 생각나는 대로 정리했다.
한 번 더 보고 정리하려고 했는데 우선 떠오르는 것을 써둬야겠다.
우선 영화에 대한 감상평은 조여정의 멘트로 대신하고 싶다. 지금 정확히 생각은 안나는데 “깔끔하다”. The simple is the best. 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고, 디테일 마저도 깔끔하다.
웃음으로 시작해서 비극으로 치닫는 순간까지 관객들의 마음과 감정은 자연스럽게 바뀐다.
거기에 주안점이 있다. 쓰레기통 속 화장지에 케쳡을 뿌린 모습에서 나도 웃었다. 이게 과연 웃을 일인가 싶지만, 감독은 관객이 기어기 웃게 만든 것이다. 그 웃음의 정점이 그 장면이었다. 바로 그게 가족 전부를 그 집에 들어오게 한 마지막 계획이기도 했다.
그런 웃음이 비극으로 이어지는 계기는 뭐였을까.
우선은 지하에 사람이 더 있다는 설정에서 그들의 비극을 공유하게 되고, 비극을 가진 자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그것이 오늘날의 세태인 것을 아는 순간 관중들의 웃음기는 슬슬 사라진다. 가진자와 갖지 못한 자의 대립이 아니라, 갖지 못한 자들끼리의 대립이 팩트폭격인양 관객들을 얼어붙게 한다.
정작 기득권을 지닌 사람들은 그 아래를 보지도 않는다. 반지하의 창고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겨우 조여정이 지하 창고로 내려가는 모습이 나오지만, 기득권으로 착각한 과외선생님에게 줄 음료를 찾아서 내려왔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지하 세계에 대한 관심은 없는 설정이다. 거실 테이블 아래에 숨은 가족들도 절대 발견되지 않는다. 아무리 냄새가 나고,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린다 하여도 발견되지 않았다. ‘밑’은 안본다. 그것이 감독의 세팅이다. 우리는 송강호가 걸릴까봐 조마조마했겠지만, 심지어 테이블 밖으로 나와도 걸리지 않는다. 기득권은 그들이 기생충으로 보는 것에 대해 일절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비가 내리는 떨어져있는 바깥의 아들과 무전교신이 더 잘된다.
박소담의 방, 침대 밑에 숨은 최우식에 대한 관심은 결국 강아지 하나였고, 박소담도 잠깐 보는 듯 침대아래 시트를 살짝 열어재끼지만, 알아채지 못한다. 복선이다.
집에서 탈출한 가족들을 따라 화면은 내려가고 내려가고, 집으로 도망가는 모습은 바로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집 안의 계단을 내려가고, 정원의 계단을 내려가고, 언덕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고, 그 다음 언덕 아래로 계단을 이용해 아래 동네로 이동하고, 그렇게 내려가다가 잠시 다리 밑에서 비를 피한다. 현실로 돌아가며 그들은 잠시 죄책감을 가지며 걱정한다.
그리고 또 집으로 내려가고, 집이 있는 계단 골목을 그렇게나 내려간다. 그리고 마주한 홍수난리 속에서 그들의 집이 거기서도 반쯤 더 내려가있는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집으로 내려간다. 거기 화장실에서 태우는 담배는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도구로 쓰였다. 가장 밑이 가장 편한 곳이 된다.
부잣집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과외알바는 친구의 요청으로 들어왔고, 박소담은 없는 자리를 만들어 들어간다. 그러나 박소담은 있던 자리인 운전기사를 일종의 작업남으로 만들어 교체했고, 심지어 가정부를 교체하는 것은 순전히 정상인을 갈아치운 것이었다. 심지어 복숭아를 이용한 계략은 누군가의 약점을 상당히 악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결국 칼을 맞은 게 아닌가 싶다.
누군가에겐 재미였지만, 그 돌을 맞은 피해자가 있었기 때문에 비극이 시작되는 것이다. 가정부가 돌아오면서 상황이 터닝포인트를 맞이한다. 보통 이 정도 시점이 전체 영화의 1/2을 지날 때다. 나중에 시간상으로 어떤 부분이었는지 확인하려고 한다. 런닝타임의 44%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재미로 시작한 자리 뺐기가 비극의 문을 연 시점이다. 가장 밑바닥의 사람들끼리 더럽게 자리 뺐기를 하는 세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거기서 지하세계에 대한 설정(원래 거기 사람이 있었다)이 추가로 문이 열리면서 이 영화는 가고자하는 방향을 명확히 제시했다. 이부분에서 다소 스토리 개연성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감독이 가고자 하는 길을 우리에게 찍어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기서 의도를 알아챌 수 있어야 한다. 또다른 기생자가 있다는 설정과 그들과 대립한다는 설정이다. 영화 ‘어스’도 그림자의 지하세계를 보여주는데, 다소 유사성이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렇게 큰 사건이 있었는데도, 지하세계는 발견되지 않는다. 왜? 앞서 말했듯 사람들은 아래 세계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박소담이 최우식을 구해서 등에 업고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왜 지하세계는 발견되지 않았을까. 침대 밑을 살짝 들쳐본 박소담이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과 같다.
박소담이 열린 지하세계 앞에 쓰러진 최우식을 봤을 거라 추정되지만, 그 문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침대 밑 장면의 복선이다. 그들은 절대 지하세계를 모른다. 남자 아이가 귀신을 봤다는 것과 같다. 지하에 관련한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인 것이다.
마지막에 최우식이 집을 사는 상상을 한다. 이것이 현실이길 바란 사람도 있었을까? 관객의 심리는 다시 요동친다. 하층민 송강호의 실수와 현실이 불쌍해서 다시 그들편을 들 수 있을까?
희극에서 비극으로 달려온 이 영화에서 최우식의 상상이 일종의 해피엔딩처럼 끝나길 바란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은, 역시 감독의 장난이다.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박사장을 죽인 살인자이다. 이 영화는 문서위조학과에서 시작된 희극이 아니라, 4명이 사망한 비극으로 이미 건너왔던 것이다.
최우식이 집을 산 장면에서 그렇게 마치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듯, 영상을 아래로 아래로 또 내려버린다. 그리고 올가가는 자막 대신, 최우식의 상상임을 보여주고 영화를 끝낸다. 영상이 내려오니 현실이 나타난다. 최우식이 그 집을 사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영화의 전개에도 맞지 않다. 위와 아래는 영원히 분리된 세계이다.
끝나는 장면은 비가 내리는 날, 그렇게 그렇게 내려오던 곳, 심지어 물에 잠겨 수중이 되었던 그 지하세계의 ‘현실’에서, 바로 거기서 끝이 난 것이다.
시중에 있는 어떤 리뷰도 읽지 않고 직접 생각한 것만을 썼습니다.
별내용은 아니지만, 인용 시에는 출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