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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 법정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의 대중가요에도,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그런 가사 하나에도 곧잘 귀를 모은다.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깊은 밤 등불아래서 주소록을 펼쳐 들고 친구들의 눈매를, 그 음성을 기억해 낸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한낮에는 아무리 의젓하고 뻣뻣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해가 기운 다음에는 가랑잎 구르는 소리 하나에, 귀뚜라미 우는 소리 하나에도 마음을 여는 연약한 존재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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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책읽기
8월. 고민의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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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1947년 <그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 2020년, ‘화혜복소의, 복혜화소복‘(禍兮福所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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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책 읽기
2020년 읽을 책과 읽은 책들 (5월 기준) ♦ 주제사라마구, 작은 기억들 / 에세이 / 해냄 / 2020.2.26. ♦ 니체의 말, 니체(시라토리 하루히코) / 철학 / 삼호미디어 / 2020.3.10. ♦ 발터 벤야민의 도시산책자의 자유 / 윤미애 / 철학/ 문학동네 / 2020.2.28. ♦ 다산의 마지막 공부 / 조윤제 / 자기계발 / 웅진지식하우스 / 2020.2.28. ♦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2020) / 강화길, 최은영, 김봉곤, 이현석, 김초엽, 장류진, 장희원 외 / 소설 / 문학동네 / 2020.4.8. ♦ 짓기과 거주하기 / 리처드 세넷, 임동근 / 인문 / 김영사 / 2020.1.3. ♦ 관료로 산다는 것 / 판수즈(이화승) / 역사 / 더봄 / 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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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과 ‘헛간을 태우다’
참여 중인 ‘책다방’ 프로젝트로 영화 ‘버닝’을 관람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창동이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배역을 가지고 철학적 장난을 한 것이라면 나는 정말 놀랐다고 말할 것이다. 이 부분은 추후 나오는 평론가들의 말을 보고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다. 다만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은 나만의 ‘재미난’ 시각일 뿐일 수 있다. 관람 전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단편소설이라 이 자체가 영화가 되기엔 무리가 있을 거로 보았다. 열린 결말이긴 했지만 그보단 시작도 끝도 없는 단편 이야기라는 느낌이었다. 큰 뜻없이 짧게 툭 던지고 끝나는 소설. 그렇기에 확장성이 생기는 역설. 이창동은 앞뒤로 이야기를 부가해 내용을 전개했다. 우선 영화와 소설은 완전히 다르다. 이창동은 ‘버닝’이라는 단어 자체하나에 몰두하여 영화를 전개한다. 한 인간의 심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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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2013년 ‘쇼코의 미소’ 소설 단편으로 작가세계 신인상에 당선되었고, 매년 개최하는 젊은작가상 작품집에 2014년 ‘쇼코의 미소’와 2017년 ‘그 여름’이 당선하여 수록됐다. 이번에 ‘그 여름’에 더해 6편의 추가 단편 소설을 묶어 낸 것이 ‘내게 무해한 사람’이다. 작가는 여자이며, 나와 같은 나이다. 통하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았으나 잘 읽히지 않았다. 어떤 구절들은 꽤 마음에 안들 정도였다. 기술(記述)적인 부분에서 내공이 약한 느낌이었다. 각 단편을 시작하는 도입부도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있었다. 스타일 자체가 그런 듯했다. 또는 나의 가독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다. 이 때문에 앞에서부터 읽지 못했고, 읽기 쉬운 것부터 골라읽었다. 두 편쯤 읽고 나니 작가의 마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글을 읽지 않았고, 행간에 걸친 마음을 읽었다. 7편에 담은 사건과 이름들은 수식이었다. 가족, 동성친구, 이성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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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젊은작가상 ‘더 인간적인 말’
2018 제9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여기 수록된 단편 중 ‘더 인간적인 말’(정영수)에 대해서 포스팅한다. 현재 참여중인 ‘책다방’ 프로젝트에서 읽은 책이다. ‘책다방’에 대해서는 추후에 소개할 예정이다. 정영수, 「더 인간적인 말」 작품 공식소개 소모적인 논쟁에 지쳐 이혼을 결심한 부부에게 안락사를 결행하러 스위스로 떠나려는 남편의 이모가 나타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나가는 이모를 보며 부부는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배운다. 결국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인간관계와 말의 한계를 섬세하게 드러내 보이는 작품.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인간적’의 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적인 말’은? 토론을 좋아해서 만나 결혼해 살고 있는 부부에게 권태기가 찾아왔고, 늪처럼 빠져들어간다. 토론은 항상 적대적으로 끝이 나고, 상처만 남게 된다. 이혼까지 결심하게 되는 그들은 도대체 왜 싸우고 있을까. 상대는 내 말을 듣지를 않고, 이해도 못하며 자기 주장만 한다. 토론을 좋아했던 그들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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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썩은 사과 몇 개를 신의 의도보다 조금 일찍 추려낸다고 해서 달라질 게 뭔가요? 당신은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거예요. 모든 죄악은 욕망에서 시작한다. 그 욕망이 부패를 가속화한다. by sincereu 이 소설의 구도는 간단하다. 살인과 그것의 동기가 대립한다. 살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는 범죄이지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그 동기에 명분을 실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리고 그 설정은 한 인간이 욕망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합리화된다. 마지막 경찰까지도 포함이다. 결국 주인공은 살인에 대한 어떠한 처분도 받지 않은 채로 이야기는 끝난다. 물론 열린 결말 속에 들킬 수도 있는 여지가 남아있지만 그것은 작가가 도덕적인 면피를 구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잡히지 않는 것이 소설의 목적에 부합한다. 썩은 사과를 버리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