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2013년 ‘쇼코의 미소’ 소설 단편으로 작가세계 신인상에 당선되었고, 매년 개최하는 젊은작가상 작품집에 2014년 ‘쇼코의 미소’와 2017년 ‘그 여름’이 당선하여 수록됐다. 이번에 ‘그 여름’에 더해 6편의 추가 단편 소설을 묶어 낸 것이 ‘내게 무해한 사람’이다. 작가는 여자이며, 나와 같은 나이다.
통하는 부분이 많을 것 같았으나 잘 읽히지 않았다. 어떤 구절들은 꽤 마음에 안들 정도였다. 기술(記述)적인 부분에서 내공이 약한 느낌이었다. 각 단편을 시작하는 도입부도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있었다. 스타일 자체가 그런 듯했다. 또는 나의 가독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다. 이 때문에 앞에서부터 읽지 못했고, 읽기 쉬운 것부터 골라읽었다.
두 편쯤 읽고 나니 작가의 마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글을 읽지 않았고, 행간에 걸친 마음을 읽었다. 7편에 담은 사건과 이름들은 수식이었다. 가족, 동성친구, 이성친구, 부모님, 자매 등 다양한 관계에 담은 감정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아련함’이었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대중성, 그에 반하는 식상함은 동시에 다가오는 것이다. 이를 잘 풀어내는 것이 숙제였다.
작가는 독자가 서서히 들어오길 바라는 듯 슬며시 문을 열어놓았다. 급하게 문 앞까지 달려왔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이내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듯했다. 그렇게 그저 작가의 감성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내 마음을 팔로잉했다. 그렇게 마음의 문이 열릴 때 어쩌면 아픔일지도 모를 지난 일이 떠올랐다.
사실은 아픔이기보다 ‘기억’이 더 정확한 표현인데, 언젠가 그 기억이 사라진 것이 나의 의도된 조작때문이 아닐까 돌이켜봤다. 기억이 교묘히 감춰진 것은 그것이 꽤나 아팠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관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일관된다. 어쩌면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동적이다. 자기표현을 전혀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종류의 사람으로 느껴진다. 작가들을 소개하는 자리에 출연한 최은영 작가는 실제로 그런 모습이었다고 한다. 수록된 모든 글들이 그렇다. 아주 천천히 보여주는 느린 방식이다. 그렇지만 지루하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아련한 기억’에 대한 독자의 개별성 때문이다. 책 안에서 나 또한 가졌던 보편적 삶의 기억이 자연스레 소환된다.
이런 틀로 가득찬 단편모음집이다. 애써 벗어날 필요없는 속박된 기억에 나를 기꺼이 참여시킨다. 작가가 지은 오래된 ‘고성’을 몸으로 경험하고 나온 느낌이었다. 다만 이런 설정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감성에 기반하여 글을 전개하면서 다양한 스토리를 부여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맨 느낌이 든다. 그렇게 짜여진 관계에 감성이 적절히 녹아들지 못하는 전개의 아쉬움이다. 하지만 이미 책을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에 크게 방해되는 부분은 아니었다.
수록된 ‘그여름’은 2017년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품이다. 올해 읽은 2018년 젊은작가상 작품집에서 좋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최은영에 대해 기대한 부분이 있었다. ‘그여름’에서는 학창시절의 여성 친구끼리 서로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갖는 평범하지 않은 관계를 제시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순수’라 느껴졌다. 그 특수성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아련한 기억’이란 보편성으로 충분히 상쇄되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동성애에 대한 ‘환기’는 나머지 6편을 통해 충분히 제거되었다. 굳이 그 세부요소에 관심을 갖거나 논란이 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번의 모음집은 최초 1편으로 시작했던 ‘그 여름’에서 본인이 강조하고 싶었던 ‘순수’ 혹은 ‘아련한 기억’을 강화하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 그 부분이 좋았다. 방법에서는 조금 아쉬웠지만 일관성이 선명해서 좋았다.
감정이 요동치지 않고 잔잔하지만 깊은 여운을 주는 글이었다. 어찌할 수 없는 시간들 앞에서조차 우린 그저 깊고 무겁게, 내 안으로 받아내는 것이다. 아픔이었을지도 모를 그것들을 다시 꺼냈을 때 그것이 여전히 차갑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간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왔다. 나올 때는 해가 쨍한 느낌인 것이 분명 긍정적이라 느껴진다. 이야기에 공감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그 안에 담긴 마음들에 잠시 젖어있었다.
–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 201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