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과 ‘헛간을 태우다’
참여 중인 ‘책다방’ 프로젝트로 영화 ‘버닝’을 관람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창동이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배역을 가지고 철학적 장난을 한 것이라면 나는 정말 놀랐다고 말할 것이다.
이 부분은 추후 나오는 평론가들의 말을 보고 결론을 내리도록 하겠다.
다만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너무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아닌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은 나만의 ‘재미난’ 시각일 뿐일 수 있다.
관람 전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 ‘헛간을 태우다’를 읽었다. 단편소설이라 이 자체가 영화가 되기엔 무리가 있을 거로 보았다. 열린 결말이긴 했지만 그보단 시작도 끝도 없는 단편 이야기라는 느낌이었다.
큰 뜻없이 짧게 툭 던지고 끝나는 소설.
그렇기에 확장성이 생기는 역설.
이창동은 앞뒤로 이야기를 부가해 내용을 전개했다.
우선 영화와 소설은 완전히 다르다. 이창동은 ‘버닝’이라는 단어 자체하나에 몰두하여 영화를 전개한다. 한 인간의 심리를 점차 증폭시켜나가 Burnt(Burned)로 끝내는 방향을 선택한다. 이는 소설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다. 굳이 나온다면 소설 뒷부분에 붙여야 할 부분이다.
소설에서 착안한 것은 주인공의 배역과 성격뿐이다. 이대로는 하루키를 홍보로 이용하는 것뿐이다. 이창동의 시도는 오히려 원작을 ‘완성’하려는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좋겠다.
영화 자체만 놓고본다면, 이 영화는 유아인(종수)의 감정변화가 시작과 끝이다. 결국 ‘벤’이 여자를 죽였냐 안죽였냐는 무의미해진다.
벤은 잊었지만 종수는 잊지못하는 ‘귤껍질 까기’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면 되는 거예요.”
그녀가 사라졌다는 걸 잊어버리면 그녀는 존재하는 게 된다. 그러나 잊어버리지 못한다. 결국 종수는 끝에서 극단적 행동을 한다. 소설의 ‘나’도 아직까지도 매일 아침 헛간 앞을 달린다. 타오름, 버닝의 실체다. 인간은 ‘무(無)’의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마음 안에 인셉트된 ‘무’의 이야기다. 없는 것을 자각해야만 하는 숙명이다. 쓰러져가는 비닐하우스도, 낡은 헛간도 결국에는 없어져야 할 무의 세계이나 우리 의식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벤’은 그녀가 살아있는 증거가 되고, ‘종수’의 행동은 그녀의 부재를 견고히 한다.
소설과 같이 놓고본다면, 우선 소설은 단조로운 구성이다.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나온다. 주인공은 ‘나’인 남자다. 1인칭 시점으로 전개하니 당연히 나의 심리가 이야기의 주가 된다. 또다른 남자는 ‘그’로 여자는 ‘그녀’로 적힌다. 단순한 구조다. 자연히 나를 제외한 두 명의 심리는 설명되지 않는다. 남의 속은 알 수 없는 게 아닌가.
영화에서는 각각의 배역이 캐릭터를 가져야하므로 이 부분이 보다 선명해진다. 그러나 ‘그(벤)’는 원래가 ‘개츠비’로 묘사되는 수수께기 인물이기에 알 수 있는 부분에 한계가 있다. 다만 ‘그녀’에 대해서는 이창동이 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부분이 영화에서 크게 달라지는 부분이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보자. 나는 열 살 가량 어린 그녀와 한달에 한 번 정도 종종 만났다. 그녀의 천진난만함, 단순함에 이끌렸다.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자체를 즐겼고 그 안에 이해와 동정은 없었다. 단지 그 자체에 대한 재미였다. 그녀와 섹스를 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그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기에 묘사되지 않는다. 책에서처럼 ‘친구 같은 관계였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관계였다.
영화에서는 시작부터 관계를 갖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모르겠다. 종수가 벤에게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창동이 ‘버닝’에 몰두했기 때문에 그런 설정은 당연하다.
나는 다만 이 소설에서는 왜 관계를 갖지 않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사실은 이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있음직한 합리적인 구성이다. 크게 엮이지 않는 감정의 관계다.
소설의 ‘나’에게 그녀는 어떤 존재였을까. 1년 전에 사라져버린 그녀. 찾으려고도 했지만 열심히는 아니다. 평범하게 지나쳐간 사람을 잊듯, 쉽게 잊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이따금씩 생각날 뿐이다. 이 남자에게 그녀는 ‘헛간’일지도 모른다.아끼는 집이 아니다.
그런데 이창동은 그녀에게 ‘사랑’을 부여한다. 그녀의 심리와 삶의 배경을 설명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를 통해 한 인간의 실체로 배역을 부여한다. 30년만에 영화로 재탄생하면서 달라지는 부분이다.
‘여성’의 시각을 부여한 것은 이창동만의 해석이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해지는 시점이다. 소설로만 보면 이 여성은 미스테리 인물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수동적인 피해자이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유아인이 그녀에게 ‘사랑’과 ‘창녀’를 선사했고, 그녀는 나름의 정신세계를 구축한다. 그레이트 헝거는 그녀의 철학을 설명한다. 더이상 수동적이지 않다. 2018년의 현실에 맞게 각색된 것이다. 난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남성 중심의 소설이라 판단했다. 이창동이 이를 각색한 것이라 해석하고 칭찬하고 싶다.
이 소설에서 그녀의 이야기에 지루해하는 사람은 ‘나’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지루해하는 사람은 ‘그(벤)’이다. 왜 이렇게 했을까. 나는 이부분에서 배역이 장난스럽게 바뀐 것이라 생각해본다. 결국 소설에서 ‘그’와 ‘나’는 다를 게 없다는 의미다. 그녀에 대한 생각이 어디쯤 있을 만한 ‘헛간’에 머무르는 면에서 그렇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무방한 그것. 살인자는 ‘그’일 수도 있지만, ‘나’일 수도 있는 의미다. 그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두 명의 남자 앞에서 이창동은 여성을 실체화하여 그들을 디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미는 자발적으로 사라진 것이 된다. 만약 살해당했다 하더라도 더이상 해미는 발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다. 안타깝고 잊지못할 대상인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재탄생된 ‘헛간을 태우다’는 그렇게 해석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