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세종로
디스토피아 세종로
- 들어가며
미술관에서 ‘화가들의 천국, 천국의 이미지’ 라는 전시를 보고 종로로 걸어 나왔다. 공간에서 벗어나 길을 걷는 것은 그것을 되새기는데 좋은 효과가 있다. 덕수궁 돌담길도, 삼청동 옛길도, 인사동 전통 길도 좋다. 최근 들어 ‘미술관에 있는 조경가’라는 문구가 좋아졌다. 물론 나는 아직 조경가가 아니지만 로랭과 푸생으로 시작된 풍경식 정원의 그림들로 익숙해진 미술의 영역은 이제 조경가에게서 멀리 떨어져있지 않다. 그리고 오늘 본 화가들의 이야기는 우리를 더욱 철학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들은 ‘아르카디아(Arkadhía)’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토피아라고 말할 수 있는 이것은 예술의 장르를 넘어 모두가 이야기했던 이상(理想)이었고 조경이 추구하는 최선의 이상향이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꿈꾸었던 관심사였다. 그리고 에덴의 동산에서 시온의 산까지 성경에 기록된 이상향이며, 고통은 없고 즐거움만 있다는 불교세계의 극락이다. 도연명의 유기(遊記)에서 안평대군의 꿈 그리고 나의 꿈으로 이상(理想)은 계속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조경업을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공간들은 과연 그것들이 실재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운이 좋게도 그것들이 존재하는 듯하다. 남산 꿈의 공원, 북서울 꿈의 숲 등 서울에서도 ‘꿈’은 가까이에서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들에게서 아무 감흥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너무 흔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혹은 유토피아적 발상은 미신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의 영역 밖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경복궁에 교수님과 답사를 갔다. 잠자코 자연의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나지막이 마운딩 된 풀밭 위에 모여 있는 초등학생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소풍을 나온 듯 모인 학생들에게 담임선생님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정조관련 드라마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정조가 왜 어릴 때부터 공부를 열심히 하였는지 묻고 있었고 학생들은 그 답으로 자신의 출세가 아닌 백성의 안녕을 위한 것이었다고 대답하였다. 나 역시 한명의 백성으로서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왕이 꿈꿨던 그 풍요와 안정을 언급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 평안을 무엇이라고 따로 정의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 이상(理想)에 대해 감지하고 있었다.
조경은 사실 이 같은 이상에 가까워있는 듯하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조경은 대개 좋은 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끔 우리는 타분야의 맹목적인 단순성을 나무라면서까지 직업의 우월성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네 조경은 새로운 지위를 획득했고 어느새 권위까지 쌓아가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런 경향 속에서 화가들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우리의 본질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나무 심는 것, 보도를 정비하는 것, 연못을 만드는 것 등의 조경(造景)은 태초부터 그 대상(對象)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개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목적은 조원가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에게 있었다. 이는 시대와 사상에 관계없는 본질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란 대상의 레이어를 켜놓고 지금 한국의 도시와 도시 속의 조경이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흔히 말하는 조경의 진정성을 필자는 간단명료하게 ‘천국’ 혹은 ‘낙원’이란 키워드로 해석해왔고 미술관에서는 아르카디아로 해석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과 경험이 바로 우리에게 본질을 떠올리게한다. 이렇게 공간과 사람이란 대상이 함께 존재하는 총체적 레이어를 다른 말로 문화(文化)라고 할 수 있다. 문화는 사조(思潮)와 같이 생겨나고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새로운 것이 생겨났을 때 그것을 원래 존재해왔던 긴 역사의 흐름과 비교해볼 수 있는데 그것이 그 전과 후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느낌을 가졌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전자는 문화에 순행하며 이상(理想)이라고 말할 수 있고 후자는 틀린 것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이상(異常)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날 우리의 도시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본의 아니게 필연적으로 앞만 보고 성장해왔고 그것은 대한민국에 하나의 문화로써 자리매김하였다. 조경이기 전에 건축과 도시가 있었다는 이유로 조경의 방향도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빠르게 또 다른 변종적인 이상(異常)을 만들어내는 도시가 된 서울에서 우리의 본질로부터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 도시 속에서 오늘날의 조경은 그리고 세종로는 여전히 원형적인 유토피아의 심상을 담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려한다.
2. 본론
① 문화의 기준
세종로의 느낌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비평의 기준이 되는 한국적 이상향과 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한국에는 문학과 시에서 무릉도원(武陵挑源)으로 수없이 회자된 지리산 청학동과 제주도의 이어도가 있다. 육지의 지리산 청학동은 시화집인 파한집과 소설 태백산맥 등 많은 작가와 시인들의 글에서 이상향으로 나타나는 곳이다. 한편 이어도는 제주도의 여인들에게 남편이나 아들이 깃든 곳 그리고 자신들도 따라 떠나게 될 곳으로 믿어졌다. 이어도는 죽음의 섬인 동시에 구원의 섬으로 여겨졌다. 이 두 곳이 관념상 아르카디아와는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이 꿈을 꾼 이유로 그 공간이 존재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유토피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적 특성인 피안(彼岸)이 유토피아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특수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곳이 서울의 사대문 안에도 존재했는데 그 곳은 피맛골이다. 이 길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운종가를 지나는 왕이나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운종가를 지나다가 말을 탄 고관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이는 흔히 우리가 사극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서민들은 분명히 그 시간을 불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서민들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대로(大路) 주변에 있는 좁은 골목길로 다니는 행태를 선호하게 된다. 피맛골은 이때 붙여진 이름이다. 좁은 골목길이 그들에게는 일종의 도피처였던 것으로 오늘은 이것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던 아르카디아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 피안의 골목길은 지금 재개발에 의해서 곳곳이 뽑히고 파괴되고 다시 건축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반발도 심하다. 이 길이 개발에 발맞추어 어느 정도 자연스레 상업성을 가진 골목으로 변모해오긴 했지만 이처럼 최신형 상업 가로로 변질되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이다.
피맛골을 나오면 세종로에 들어선다. 이곳은 얼마 전 우리 조경의 큰 성과였던 세종로 광화문광장 조성사업의 현장이다. 조선의 건국시기로 돌아가 보면 세종로는 태조 이성계가 만든 주작대로이고 육조가 이곳에 있었으며, 세종로의 끝 황토현은 흥인문과 경희궁을 잇는 운종가와 만나는 길의 중심이었다. 그 당시 대로와 대로의 만남은 이곳 이외도 창덕궁에서 운종가가 만나는 부분과 종루에서 숭례문으로 가는 곳이 있었다. 서양의 역사였다면 이런 공간에 오벨리스크, 동상 또는 분수 등의 시설물이 세워지고 광장이 생겼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곳들이 일종의 광장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지만 서양에서 볼 수 있는 광장의 공간적 특성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사실 우리의 문화는 광장보다 길이었기 때문이다. 영화 ‘미인도’에서 김홍도가 씨름하는 장면을 그리는 장소 역시 광장이 아니고 길이었으며 영화 ‘왕의남자’에서도 주인공들이 평소 활동하는 곳은 광장이기보다 길에 가까운 마당이었다. 사람들의 커뮤니티가 공간을 점유하다가도 관리들의 말이 지나가면 서둘러 길을 비켜야 했던 문화를 떠올릴 수 있다. 이렇듯 한국의 과거 커뮤니티 문화를 보면 그것은 길의 문화였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말한 피마의 골목길도 그렇고 한양초기형성에 영향을 준 풍수지리사상 역시도 본래 그러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세종로는 조선도읍풍수와 중요하게 연관되는데 세종로에서 주산(主山)인 백악산과 안산(案山)인 목멱산을 넘고 조산(祖山)인 삼각산과 관악산으로 올라서면 이것은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백두대간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엮어진다. 즉 한반도는 백두대간으로 이어진 하나의 맥으로써 공동체적, 선적 흐름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선적인 문화이자 심리적 관계를 연결하는 문화적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맥락에서 그 중심에 세종로가 있으니 광화문 광장은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서 물리적, 심리적 길의 가장 중심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 어떤 곳보다 우리의 문화적 흐름을 좌우할 중요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② 분석
광화문광장 조성 아이디어 현상공모의 설계지침과 출품작들을 보면 여러 장치들을 통해 그 축의 물리적인 흐름을 애써 해결하려는 시도가 보인다. 그런데 한국의 선적 문화요소인 길과 맥이라는 측면에서 소통의 흐름이 읽혀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세종로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세종로 주위에 있는 수많은 중로(中路), 소로(小路)와의 연결과 흐름에 있다. 피맛골이 대로에서 사람들이 피해 들어가야 할 공간이었듯이 우리 한국의 길은 대로와 소로가 긴밀하게 관계를 맺어 왔지만 세종로에서 그것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경복궁과 육조거리의 축 등의 훼손을 바로 잡은 것은 계획의 상징성의 측면에서 볼 때 설계에 조경적 지침으로써 중요했고 당선작들은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광화문광장 아이디어 현상공모에 제출된 대부분의 작품이 말하는 개념처럼 역사의 축, 육조거리를 통한 보행중심공간, 보행활성화, 역사재현과 기억의 공간을 만드는 것도 중요했다. 전체적으로 아이디어 현상공모 당선작들은 기능적 측면에서의 공간활용, 이용자의 편의성, 공간활용의 효율성 등에 집중을 하였고 그로인해 높은 점수를 받은 듯하다. 하지만 문화공간을 만들면서 우리의 역사적 흐름에서 오는 문화적 특성을 이 공간에 녹여내지 못한 것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새로운 문화의 축으로써 조경적 유희의 공간으로 정의될 길이 주위와 자연스럽게 소통되는 맥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 안에 본질적으로 행복함을 느껴야 할 사람의 흐름을 찾을 수 없고 기대하기도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런 결과는 설계 지침 즉, 위에서부터 오는 공허감일 수도 있다. 많은 연구가 선행되긴 했지만 그 토대가 완전하진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침이야 어쨌든 이제는 다소곳한 위치에 있지 않은 조경은 도시의 조정자적 위상을 보여줄 수 있었다.
전제한 조건들에 의해 출품작들의 조감도를 보면 두인디앤씨는 녹색의 축이 눈에 띈다. 광화문에서 바라본 세종로는 흡사 베르사유를 상기시키기도 한다. 모든 도시에는 상징적 공간이 있었다는 점에 기인한 듯 보인다. 워싱턴내셔널파크처럼 긴 녹색의 장대한 축을 형성했지만 그 무엇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섬처럼 보이며 고립되어있다. 원양건축사사무소의 안도 비슷하다. 녹색의 잔디가 펼쳐져있는 이 설계안은 자연 축과 녹지축을 연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문화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녹지의 축은 상위개념으로 오지 않아도 될 만큼 천편일률적인 요소일 수 있다. 이 공간은 과거 육조거리에 육조의 관청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문화관광부나 미국대사관 등 여전히 시민의 활동공간과는 거리가 먼 공간들이다. 이곳의 오픈스페이스는 당연히 그들을 위한 공간이 아니고 시민을 위한 길임을 인지했을 때 주위 거점으로부터 이곳으로 이어지는 선적문화의 흐름이 보여야했다. 이런 면에서 서안의 조감도는 도로 위에 사람이 가득한 레이어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그리고 바닥은 도로가 아니고 길로 변해있다. 실제로 행사의 성격과 규모에 의해 어느 정도 차도가 그대로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가 길처럼 묘사된 조감도는 우리의 문화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선적 흐름의 부재 속에 연결이 되고 있는 곳은 청계천이다.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가로들이 저속한 상업가로로 변질되었던 과거를 상기시켜봤을 때 세종로는 그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상업가로경관이 탄생한 배경을 보면 ‘연결’, ‘흐름’ 이라는 공간의 기본 원리적 성격을 강조하다 그렇게 된 것이니 사실상 주위와 자연스럽게 연결한 죄밖에 없다. 광화문광장에서도 역시 가장 자연스럽게 혹은 억지스럽게 연결되고 있는 곳이 청계천이다. 바람직하지만 청계천에만 의지하는 듯 보이는 선적흐름은 과거 청계천의 얕은 물길을 형상화하는 것처럼 미세한 흐름만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실제 세종로의 사람들을 청계천으로만 몰아간다면 물길을 따라 회유(回遊)식 가로를 만든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주변에 의지할 곳이 대한민국 땅에서 가장 많은 문화의 중심임을 감안했을 때 모든 안들의 선적문화의 공허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전히 조경은 도시의 흐름을 시원스레 담지 못하고 조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자칫 세종로가 중앙광장공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다른 곳과 소통이 되지 못한다면 도시의 가로공간이기보다 시위 등의 일정 활동의 공간으로 활용될 여지도 있다. 세종로는 현재 서울시가 추구하는 문화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삼청동, 인사동, 피맛골, 덕수궁 등 문화적으로 가치가 높은 거점들이 펼쳐져있다. 그것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광화문광장에서 뻗어갈 길이고 그 길은 문화로써 시작될 서울의 전통과 역사 복원에 어떠한 형태로든 청사진을 제시했어야했다. 실제 광화문 앞에서 걸어서 10분 내에 연결되는 길은 삼청동 길, 인사동 길, 덕수궁 길, 청계천 길 등 문화적 연결가로가 꽤 많고 태평로로 해서 시청과 숭례문까지도 연결된다. 그리고 특히 세종로 좌우측으로는 삼봉 길, 청진동 길, 피맛 길, 의금부 길, 도화서 길 등 이름도 재미있고 한국전통의 골목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길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지금 광화문에서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헌집의 보석을 찾지 못하고 새집이란 보물을 원하는 도시의 욕망을 이상(異常), 역유토피아라고 정의하고 싶다. 광장은 물론 자체 기능적 요소로써 중요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흐름을 잇는 거점의 요소로써도 중요하다. 기존의 세종로를 보면 경복궁으로 들어가지도 않는 차들이 왜 이곳으로 몰려들게 계획됐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마땅히 이곳을 사람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공모 지침은 명확했다. 맨해튼에서는 사각격자의 평범한 길이 브로드웨이와 만나 교통과 사람들의 결절점에 많은 스퀘어들이 생겨났다. 로마에서는 고대 도시 축을 기준으로 교황에 의해 도시계획 된 특수성에 따라 활동성이 큰 성당 앞이 광장의 역할을 하였다. 그 문화는 예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으며 따라서 현재 그 공간은 문화적으로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문화의 산물과 우리의 것을 비교해 볼 때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우리의 것은 분명 과거로부터 이어온 문화와 동떨어짐이 존재한다. 사실 우리의 최신작을 보면 공간의 기능성이 우선하는 듯하다. 비우는 설계라고 찬사를 받은 당선작도 적잖이 튼실하게 채워져 있음을 여러 글들을 통해서 알 수 있고 실제로 그 기능성은 우수해 보인다.
③한계와 지향
이번 공모전에 많은 시간이 할애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나름의 노력이 선행된 과정과는 달리 결과는 조속히 진행되었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로 인해 지침에서의 부족함이 아마도 결과물에도 이어지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더불어 인문학자, 역사학자 등과 기술자들의 괴리 역시 아직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지침을 살펴보면 공모개요의 위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청계광장 가로 및 연접블록’ 이다. 형태적 측면에서의 평가항목은 ‘주변 환경과의 조화 및 연계성’ 이다. 공모대상은 ‘세종로 중앙광장 설치와 차도 및 보도의 포장, 사인시스템 조명, 조경시설, 기타 가로시설물 등’ 이다. 이런 지침에서 이미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모는 당연히 지침에 충실하는 것이 기본이니 우리가 설계했다 하더라도 그 책임에서 비켜설 수 있는 여지는 있다. 직업에 관계없이 관련 분야 모두에게 기회는 열려있었고 조경업체가 최종 당선안이 되면서 조경의 위상을 한층 더 올릴 수 있었으니 우리는 취할 건 취한 셈이다. 그런데 이 공모는 그동안 도시의 발전이 조경과 깊은 상관없이 상의도 없이 그리고 문제없이 잘 되가는 구태의연한 구조에 어떤 반향을 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고 실제로 결과적으로는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조경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조경의 기회로 모두 다 살리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주어진 영역은 한정되고 조건은 까다롭고 우리는 연구자이기보다 기술자이기에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세종로 광화문 공모가 지난 얼마 후 피맛골이 재개발 되는 일이 있다는 것에 우리는 깊은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다분하다. 원래 이 서울이란 동네의 개발이 아이러니하고 어리석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현상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들이 여느 때처럼 자본가들의 논리로 진행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공모전은 고작 그렇게 밖에 도시의 무분별한 개발에 어떠한 파급도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운 것이다. 응모작뿐만 아니라 설계지침에 있어서도 그렇다. 앞으로 만들어질 광화문광장 그 자체는 새로운 광장이고 휴식처이며 경관으로써 새로운 서울의 이상(理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의 축이며 역사의 재현이며 역사의 공간임을 자청했던 광화문 광장 공모전의 점수는 피맛골이 대변한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역사의 총체성을 바탕으로 세종로에 한국적 문화의 흐름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피맛골은 제 갈길 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화적 중심의 큰길과 작은 길의 연관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문화사(文化史)적으로 별개가 아니었고 긴밀히 소통했지만 지금의 현상은 서로 별개로 이상(異常)현상이 되어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피맛골과 도시재개발까지 거론해야하는 이것은 조경업의 지나친 욕심이 아니다. 배정한 선생님의 문구 ‘조경의 시대, 조경을 넘어’가 떠오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광화문 광장과 세종로를 너무 개체로써 바라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시 행정가들의 생각 그 이상으로 광화문 광장은 서울의 문화적 좌표를 제시할 수 있는 큰 기회였던 것이다. 반예술사조를 언급하며 예술가가 어떤 것을 작품이라고 인지하면 그것은 예술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던 다다이즘처럼 세종로와 연계되는 피맛골을 포함한 중로, 소로들을 조경가가 조경의 공간이라고 선언이라도 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일까.
3. 맺으며
최근 맨해튼에는 하이라인의 공모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그것은 곧 선적인 길의 흐름을 보여준다. 사각의 격자패턴을 제외하면 맨해튼에는 사실 브로드웨이만 특징적인 의미의 길로써 인지되는데 하이라인은 철로를 이용하여 맨해튼에 기존하던 것과 다른 새로운 길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맨해튼의 중심과 첼시를 연결하고, 허드슨 워터프론트와 첼시를 연결한다. 그리고 첼시에 들어와 있는 많은 공방들의 중심거점으로써 그 역할이 실로 기대되고 있다. ‘하이라인’을 두고 기존의 공원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광장이라고 하기는 더욱 어렵다. 굳이 이야기 하자면 소통을 보여주는 새로운 선적인 유희 공간이다. 글 초입부에 아이들은 왕이 가진 풍요와 안정에 대해 그것을 무엇이라고 따로 정의해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 이상(理想)에 대해 감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새로운 도시화의 흐름 속에서 굳이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등의 거대담론을 이용해 ‘하이라인’을 정의하지 않아도 조경과 우리는 그 이상(理想)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허나 사실상 이상(理想)과 이상(異常)의 분별은 문화를 기준으로 한다하더라도 쉽지 않고 주관적인 비약(飛躍)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건축과 토목이 먼저 들어서고 조경이 자투리의 땅을 활용하던 구조에서 최근에는 조경의 영역이 넓어지고 파워가 강해졌다고들 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의 본질을 지키는 책임을 갖는 것이 중요해졌다. 필자는 조경의 길에 선지 오래지 않았지만 조경의 영역은 해를 거듭할수록 넓어져갔고 손에 쥔 지식 대비 조경의 영역이 커질수록 어떠한 공허함 역시 늘어간 게 사실이다. 그 공허함은 본질인 듯 보이는 유토피아의 상실을 말하기도 하며 그런 상실에 대한 책임감을 일컫는 것일 수도 있다. 조경의 지위는 상승하고 있고 우리의 역할과 책임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단절을 해결하는 기술자에서 심리적인 단절을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한 이 시기에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조정자로 조경가가 가장 유력하다고 말하고 싶다.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시점에 도달하였고 그만한 책임을 가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왕이 다니고 높으신 분들이 당당히 궁을 향해 걸었던 길이며 왕이 있는 도성의 상징적인 길 세종로는 우리에게 열렸다. 이질적인 새로움이 닥쳐오더라도 우리가 잊지 않고 있는 우리의 문화가 있다면 그것을 길에게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 뒷길에서 추억하고 담소하고 떠들고 술을 마시고 양반들을 피해 다녔던 골목은 외로움을 안고 사라지고 있다. 육조거리는 희미하게나마 되찾고 있지만 소로는 허물리는 역시점(逆視點)의 개발시대에 조경은 살고 있다. 역유토피아의 시대에 숨은 보석은 찾지 못하고 대장간에서 보물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는 기술자가 조경가라면, 여전히 그 지위가 공방에 머물러있을지도 모른다. 조경의 시대라는 바람에 편승하여 신분상승의 고삐를 더욱 힘차게 당겨보자. 오직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거점의 공간과 선적인 공간을 아우르고, 푸른 도시와 문화도시를 아울러 지향하며 사람들이 그리는 유토피아를 우리의 감각이 말하는 이상향을 통해 실현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