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커
2019. 10월
[이미지는 추후 엔딩부분 차량 위에 일어선 사진과 포즈로 바꿀 예정]
‘조커’라는 악당의 탄생 배경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그는 영화 역사상 최악질의 범죄자다. 이제와서 나쁜 사람이 된 배경을 탐구하는 것인데, 태생적인 한계점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됐든 결과는 이미 ‘범죄자’다.
여러 가지 상황설정을 통해 나름의 명분있는 전개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 설정은 사실 뻔하게 예측가능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음은 그것이 충분히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자에 의해 피해를 본 경험은 흔한 설정 중 하나다. 그들은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파탄나게 만든다. 왕권시대와 독재시대뿐만 아니라 민주화가 이룩된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이다. ‘권력’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된다. 어쩌면 이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할지도 모를 그 팩트는 관객에게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근거가 된다.
약자의 반격이라든지, 꿈틀하는 지렁이, ‘먼저 때려서 정당방위로 죽였다’는 살인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체득했던 ‘정의’의 한계를 다시금 인식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범죄자를 옹호하는 극단으로 치달아 가면을 쓰고 거리로 나온다.
영화 V For Vendetta(2005), 최근 드라마 종이의 집(La casa de papel) 에서도 가면을 쓴 범죄자가 시민들의 추종을 받는다. 권력에 대항하는 그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하나의 주권단체인 것을 관객에게 어필하면서 하나의 조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조커는 사실 이렇게 거대한 야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조크(joke)를 던지는 사람이었다.
‘해피’한 병이 있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고, 가족이 겪었던 슬픈 역사가 있었다. 영화는 약자의 약자로 만들어낸 그를 데리고 여러 사건들을 통해 다시 더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마침내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밑바닥으로 보내는 길을 스스로 열었다. 아주 즐거운 춤을 추면서 말이다. 그게 ‘아서 플렉’이 택한 자신이 가장 행복해지는 비극적 결론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는 선택이다.
그렇게 끝이나면 다행이었을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는 그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본의 아니게, 우연하게도 새로운 역할을 떠앉게된다. ‘다크나이트’의 비극이 시작된다. 그는 거기에 부응하면서 일어서야 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우리가 범죄에 대한 것을 납득하거나, 인정해 줄 수는 없다. 다만 한 인간의 좁혀진 선택지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장난에 조금의 동정이 스미는 것이다.
조커 / 2019. 10.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