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경, 느슨한 경계(景`界)
2011년, 조경비평대상에서 수상한 저의 글입니다.
조경, 느슨한 경계(景`界)
< 2011년 대한민국 조경비평대상 수상작> 작가 : 유시범
심사위원
조경 _ 배정한 서울대 교수, 조경비평가
건축 _ 전진삼 월간 와이드 발행인, 건축비평가
미술 _ 반이정 미술평론가
조경의 경계
조경(造景)은 글자 그대로 경치를 만드는 일이다. 경(景)은 조경의 시대를 거듭해오며 창조적으로 해석되었고 새로운 공간들을 포함하였다. 수많은 경치와 경관이 조성(造成)되면서 조경의 언어적 영역은 넓어졌고 여전히 확장하고 있다. 경관과 경치라는 단어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대상을 표현한다. 이처럼 조경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무엇을 만드는 일임에 분명하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풍경에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경관에 이르기까지 조경은 새로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도시설계, 도시공학, 건축을 넘어서 조경은 인문학, 사회학과도 결합한지 오래되었고 미술과 예술영역과의 결합 역시 조경의 역사를 통해 볼 때 결코 의외적인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보편성은 보이지 않는 조경이라는 담론을 통해 위기로 진단되기도 했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양한 협업을 통해 분명히 조경은 새로운 공간과 가치들을 양산했다. 여전히 확연히 알 수 없는 조경의 경계 밖에서 지금의 현상을 조명한 다음 경관의 경계(景`界)를 찾아 가려한다. 가장 자유롭게 이 경계를 넘나들을 수 있는 대상은 아마 사람일 것이다. 조경을 대표하는 두 가지 장소인 공원과 정원의 사이를 느슨하게 바라보면서 그것을 유추해보려 한다. 그것은 본 비평 공모에 명시된 적합한 자격을 얻기 위함과 상응한다. 그래서 조경이 무엇이고 범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과정을 거쳤다.
백과사전에 명시된 바에 의하면 조경의 범위는 ‘문을 나서서부터의 모든 외부공간’이다. 건물 밖의 지구 어디라도 조경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실내 조경이라는 말이 나온 지도 한참이 지났기 때문에 조경의 대상에 건축물 내부공간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범위는 모든 공간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공간이 조경의 대상일 텐데 실제로 조경은 그 공간에 비례하여 성장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점점 줄어간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아마 그것은 실제로 사업이 벌어지는 조경의 대상과 범위가 모호한 경계 속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조경이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물리적인 범위는 더 축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상과 범위의 확장을 위해 업계는 법과 행정 계통에서의 확장을 위해 힘을 쏟고 있다. 그 노력들이 성과로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조경은 최초에 ‘나무 심는 일’이었지만 최근에는 ‘공원을 만드는 일’로 인식이 되고 있다. 2008년 고정희조경설계연구소에서 50명 정도의 사람을 대상으로 간소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조경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를 살펴봄으로써 조경문화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설문의 결과는 한 마디로 “조경이 아직은 우리 사회에서 문화로 여겨지지 않지만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크다.” 라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선유도 공원을 필두로 여러 공원들이 만들어지면서 조경은 공원을 만들거나 광장과 같은 공공공간을 만드는 일로 각인될 수 있었다. 그리고 주거공간에서도 아파트조경이 각광을 받으면서 조경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인식되면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했다. 조경의 시대에 조경은 나름대로 사회에 잘 적응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세계적인 조경협회 및 기관으로부터 아파트 조경이 상을 타기도 했고 선유도공원, 청계천, 서서울호수공원 등의 서울의 공원들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았다.그렇지만 여전히 위기라는 소리가 나온다. 그 이유인 즉, 공공영역의 물량이 줄어들면서 조경의 위기라는 말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간영역에서 느끼는 위기의 핵심은 이제 아파트는 안 짓는다는 것이다. 조경학과 학생들은 이미 공원이 다 만들어진 게 아니냐고 말하며 업계에서는 이제 일이 적다고 말한다. 그런 이유로 어떤 전문인들은 이제는 조경관리의 시대라고 말한다. 모두가 일리 있는 말이다. 할 게 없으면 당연히 위기다. 위기의 끝에서 나온 결론은 우리 모두 통일을 가장 원하는 직업인이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 조경의 체질이 개선되지 않은 점이 대두된다. 본래 공원이라는 공공적 개념에서 도입된 한국 조경은 공공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다. 공공분야에서 공원이라는 형태로 활성화되면서 일어난 것이다. 그 후 이것이 삶의 질, 녹색성장과 같은 세계적인 비전과 맞물리면서 지난 10년간 호황을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것은 한줄기 희망으로 든든한 배경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거대담론과 결합한 조경은 미사여구의 용어들을 쏟아내면서 외형적으로도 내형적으로도 큰 그림자 뒤로 숨어버린 일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발전적 연구가 부족한 상태에서 발생한 수요가 인스턴트식의 공급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경의 현주소를 심도 있게 찾을 여유도 없이 토건위주의 사회 속에서 함께 휩쓸린 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지금의 위기는 사회에 적절히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체질 개선에 대한 당위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큰 몫을 차지한다. 조경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질의 시초에서부터 이 부분을 조망해 본다.
조경의 공공성

이런 공공성을 가진 공급과정에서 간과해 온 가장 큰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사람과 조경 사이의 문제라면 그것이 주거공간에서 가장 크게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아파트 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주거영역에서 외부공간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아파트 조경의 발전으로 나타났다. 밋밋한 아파트단지의 외부공간은 공원같이 변화했다. 재개발 재건축과정에서 용적률이 올라가면서 건폐율은 줄어들고 단지는 쾌적한 공원이 되는 방식이다. 공원에 특별히 가지 않아도 집 앞이 공원처럼 조성된다는 콘셉트는 많은 민간건설사에서 이용한 전략이다.
용산의 한 건설사는 용산공원을 아파트 조감도 뒤에 그리고 아파트의 조경공간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홍보한 적이 있다. 그런데 최근 이렇게 아파트 조경을 공원처럼 조성하는 것은 또 다른 공공성의 문제와 맞물리고 있다. 공원의 이용이라는 측면에서 아파트 단지 조경공간의 개방을 요구받는 것이다. 그 예로 서울시는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를 하면서 압구정 현대아파트를 고층으로 지어주는 조건으로 단지 토지 일부를 회수하는 방침을 세웠다. 그곳에 공원을 조성함으로써 아파트의 외부공간과 한강 워터프론트 공간 모두를 공원화하고 도시의 공공성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당연히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외부공간의 공공성과 사유성의 경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본래 조경이라는 것이 주거공간과 결합했을 때 공간적으로는 사유화된 정원의 형태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볼 때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물리적으로 그 규모가 크다 하더라도 단지 내 거주민을 위한 정원의 확장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공원으로 표방되던 조경이 갖고 있던 공공성으로 인해 주거공간 안팎에서 공공성이 상충하는 것으로 진단할 수 있다. 이러한 조경공간과 이용자와의 간극은 조경이 갖는 체질문제의 근본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이용자의 니즈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1인당 차지해야 하는 녹지면적에 급급한 공급 행태와 단지 내 조경의 면적 늘리기에 급급한 행태가 공간과 이용자의 관계를 끊은 것은 아닐까. 혹은 공공(Public)에 집착한 나머지 사유(private)를 망각한 것은 아닐까. 그 둘의 경계에 있는 반(Semi-)에 대한 성찰이 없었던 것이 이유일 수도 있다. 주민 개개인이 주거공간에서 요구하는 것이 공공성이 짙은 공원만은 아닐 것이다. 공원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공공성이 조경의 공간이 갖는 가치를 옭아 맨 것이다.
조경의 사유성
아파트는 태생적으로 정원의 모습을 담기에는 주거 밀도가 너무 높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에 거주하는 가구 수의 비율은 2010년 11월 기준 47.1%이다. 5년 전에 비해서 5.4% 늘었다. 단독주택 비율은 39.6%로 5년 전에 비해서 4.9% 줄었다.처음으로 아파트 거주 가구 비율이 단독주택 비율을 넘어섰다. 역전된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가 여전히 강세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단독주택이 주목을 받고 있다.경제적인 현상과 사회적인 현상이 결합된 복합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조경의 입장에서 볼 때 쉽게 지나칠 일은 아니다. 지난 7월 MBC에서 ‘내 집 장만 프로젝트 땅콩집’이 방영된 이후 사람들의 단독주택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했다. 그 관심은 어느새 땅콩집이 여럿이 모인 땅콩밭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서울 근교 고양시와 용인시 등 10군데 이상의 장소에서 진행되고 있다. 사실 단독주택에 대한 관심은 몇 년 전 타운하우스가 유행할 때부터 나타났지만 당시에는 가격이 고가이다 보니 큰 이슈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땅콩밭은 서울 교외에서 아파트 전세 가격 수준의 가격에 집을 얻을 수 있다는 점과 마당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 크게 부각되어 이슈가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각각의 집은 작은 마당을 갖게 되면서 자연히 거주민들은 주택 외부공간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30~40대 부부로 어린 아이가 있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개인 마당을 갖게 된 다는 점에 크게 주목하고 있다. 공공의 마당이 아닌 개인의 마당, 개인의 정원인 것이다. 경제적 여건이 되는 사람들만 찾아 나섰던 외부공간에 대한 로망이 확대되는 형국이다. 물론 그 크기는 작을 수 있지만 말이다.

사실 이런 외부공간에 대한 인식의 확대는 비단 땅콩집과 타운하우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행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농림수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전원마을조성사업은 도시에서 떨어져 있지만 전원마을을 찾아 귀촌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을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그 마을에는 개인정원이 있고 공동으로 텃밭이나 농장과 같은 외부공간을 다루는 프로그램도 포함되어있다. 공동체 생활이 외부공간과 결합하고 있는데 이러한 공동체 생활은 도시에서도 발견된다. 서울의 성미산 마을에서는 육아, 교육, 환경, 먹거리 등의 이유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서울시 디자인서울빌리지 사업의 경관협정을 통해서도 공동체는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체 문화는 주거외부공간에서의 공간의 공동사유화로 이어진다. 성미산 마을에는 코하우징이라는 주거형식에서 발생한 소행주라는 공동주거형태도 생겨났다. 코하우징은 생태적 삶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공동주택단지의 특성을 유지하되 단지 내에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유시설을 갖추고 있다. 많은 현상들이 각기 다른 이름과 형태를 갖지만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정원, 마당, 뜰, 텃밭, 밭, 마을숲 등의 외부공간을 표현하는 키워드로 나타난다. 사실 이것을 사유화라고 명명하긴 어렵다. 때로는 공공적 성격을 갖고 때로는 개인사유적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분명히 공공성의 완화라는 측면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기존 공원과 아파트 조경이 갖는 한계에 대응해서 체험적이고 실재적인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옥상으로 뻗어나간 조경이 건물 전면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공공성과 사회성의 경계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기준은 이용자에게 있다. 공간은 전체적인 공공의 기능이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인성을 실제 현상에 반영하는 것을 흔히 사회학적 용어로 주민참여라고 한다. 조경분야에서도 주민참여는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 공공성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소통에 대한 요구다. 개개인은 직접적으로 현실 디자인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민참여디자인’이란 말로도 표현되는데 충북 영동의 백화마을과 도시연대의 한평공원 사업 등에서도 인용되었다. 주민참여디자인은 주민들이 공동으로 각종 마을과 관련되는 프로젝트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마을뿐만 아니라 규모가 큰 공원조성 과정에서도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주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이나 계획 및 디자인 과정에 주민이 개입 할 수 있는 참여의 기회를 제공하여 주민들이 원하는 바가 계획, 설계, 디자인에 반영되게 하는 접근 방법이며 결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하는 과정이다. 외국에서는 일찍이 공원의 조성 및 관리 또는 리모델링 차원에서 시민단체가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이러한 주민참여 디자인은 기존의 공급자 중심의 공간설계에서 수요자 중심의 설계이며, 전문가 주도의 하향식 접근이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의 상향식 설계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민의 요구와 환경을 이해하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 디자인의 주권을 주민과 함께 하는 민주적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건축가, 설계디자이너는 전문가 혹은 결정자의 역할보다는 사용자 및 커뮤니티로부터 요구사항을 이끌어내고 협력을 촉진하는 역할을 담당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움직임은 사유성이 짙은 작은 마을단위에서부터 사유성이 어느 정도 공공성으로 대체되는 각 아파트 단지 내의 공간에 이르기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공공성이 짙은 서울의 대형 공원에서도 그 징후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공원에도 주민들은 참여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내 손으로 직접 실현하고 싶다는 개인적 욕구로부터 발생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용자들이 참가했을 때 그들은 공간에 더 큰 애착을 보인다.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는 일찍이 나무를 기부하거나 운영비 기부를 통해 벤치를 만드는 등의 참여를 하고 있다. 서울의 북서울꿈의숲에서도 시민참여를 통해 나무와 벤치를 기부하고 있고 서울숲에서는 시민재단 서울그린트러스트가 공원의 조성과 관리운영에 관련된 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지난 8월 노을공원에서는 더 나은 공원의 미래를 위해서 ‘노을공원 시민모임’이 개최되었다. 시민들은 ‘가족 나무심기’ 행사를 통해 앞으로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을 다짐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도시에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한평공원 만들기, 도시 내 정원 만들기, 우리 동네 숲가꾸기 그리고 자투리 땅 이용방식에 대한 주민간담회 등 크고 작은 현상들이 담아내는 것은 공동체적 현상을 공간에 투영해내는 일이다. 이것은 공원이나 공공공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물리적 기능의 한계를 넘어서서 사회적 기능을 이행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예부터 공원은 다양한 사회적 기능을 담고 있었지만 공공의 영역에 있던 사회성이 사유의 영역으로 확장함에 따라서 더 많은 개개인의 경험까지 담을 수 있는 차원으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향식(Up-bottom)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인 니즈에서 출발한 공원이 더 나은 공공성을 갖기 위해 상향화(Bottom-up)된다는 것은 공공성과 사회성의 경계에 사람이라는 조경의 대상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갖는 인식이 이 둘의 경계를 느슨하게 해 줄 것이다.
조경의 소형화(Small Park)
사회성은 복지, 돌봄, 공동체, 이웃, 관계, 지역사회와 같은 언어들과의 결합을 지향하면서 동네에는 마을이 필요하고 마을을 위한 공공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착하고 좋은 새로운 용어들과 결합하면서 그 주장을 확장하고 있다. 이는 조경공간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의 전환으로부터 공동체화 되거나 일상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민참여와 주민 개개인의 입장에 대한 심층적인 고려의 결과가 사회운동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공원의 공공성에서 제기된 문제를 공동체적이고 사회학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다. 공동체 자체가 해결 방도는 아닌 것이다. 다만 공공성 위주의 조경공간이 일종의 해체 혹은 완화되는 과정에서 필요한 논의인 것이다. 사회의 변화와 관련해 조경분야가 따라야 할 구체적인 가치를 논하기 보다는 그 과정에서 간과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환기하는 데에 의의가 있다. 공공성과 사회성의 경계에서 발견한 대상에 대한 이야기는 조경공간의 소형화와 관련을 맺는다. 소형공원(Small Park)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공간은 지역성을 가지면서 지역의 환경변화에 밀접하게 기여하게 된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에 더욱 밀접하고 구체적인 관련을 맺을 수 있는 방법은 이런 공간의 소형화에 있다. 당연히 많은 흐름이 중첩되는 넓은 공간보다는 집약적인 공간이 정체성을 갖추기 쉬울 것이다. 이러한 정체성에 기반을 두면서 상향식(bottom-up)행태의 주민참여가 일어나는 경우를 반공공적(semi-public) 혹은 반사유적(semi-private)인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경계에서 상향식 행태와 소형화와는 다른 대조적인 것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공공성으로 무장한 넓고 쾌적한 대형공원(Large Park)의 한계가 그것이다. 공공성으로 무장한 오늘날의 대형공원은 도시 공간 속에서 녹지를 제공하고 이산화탄소를 억제하는 레토릭을 통해 착한 공원의 이미지로 남아있다. 이 대형공원은 공원이 도시에서 필수적인 기반시설의 일부가 되고 효과적으로 기능하길 바란다. 더욱이 생태, 재생, 브라운필드, 그린인프라 등의 더 나은 가치들과 연합하고 그 가치를 증명하고 있다. 도시 내에서 공공의 공원은 매우 바람직한 지위를 갖추고 있지만 공공성과 사회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조경의 문화적 지위가 경계를 넘어서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진 못한다. 이는 물리적인 규모가 갖는 어쩔 수 없는 차이와 한계 때문이겠지만 대형공원이 갖추기 어려운 소프트한 프로그램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좋은 공원의 조건에 대해 소형공원(small park) 혹은 정원(garden)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공원과 정원으로 구분되지 않는 접점에 있는 가로와 같은 공간들에도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공원의 물리적인 규모를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본다. 엄밀히 말하면 공공성의 정도에 대한 것으로 봐야한다. 그것은 조경공간을 이용하는 대상에 대한 설계자의 태도와 철학에 관한 것으로 옮겨온다. 그리고 그 조건은 계획가가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공원을 이용하는 이용자의 인식의 전환에서 시작되는 것이라 본다. 공공성과 사회성의 느슨한 결합은 마치 대형공원과 소형공원의 접점을 떠올리게 한다.

조경의 상향화(Bottom-Up)
그러나 서로간의 화해와 조화가 경계를 허무는 것은 아니다. 두 가지 방향 즉 공공성에서 사유성으로, 사유성에서 공공성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원칙론이 아니다. 조경이 체질적으로 갖는 문제는 상향화의 부재와 한계에 있다. 조경공간에 대한 개인성, 사유성에 대한 관심의 증폭이 필요한 시점이다. 공공분야가 아닌 민간분야에 대한 관심과 담론이 필요한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에게 그 과정이 없지는 않다. 경기정원문화박람회,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등을 통해 소형공원의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박람회와 공모전이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것이다.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도시재생과 환경계획의 일환으로 도시와 조경의 미래상을 구현할 것이다. 조경의 확대와 홍보의 도구로써도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이들 역시도 공공적 가치로 실현된 하향식(up-bottom)이라는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아직 정원문화가 크게 확산되지 못한 배경에는 공간과 사람간의 소통의 부재도 있다. 공공영역에서 이야기하는 정원문화는 자칫 작위적인 조경공간의 소형화일 수 있다. 도시의 녹색경관, 도시재생의 차원도 중요하지만 조경이라는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전환시키는 정원문화 환기가 필요하다. 그를 위해 최하위에 있는 저변에서부터 정원문화의 도구로써 작용할 필요가 있다. 조경공간에 대한 상향식(bottom-up) 차원의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개개인의 이용자에게서 발생하는 조경의 일상화를 의미한다. 쉽게 적용시킬 수 있는 공간적 언어는 정원이 될 것이다. 옥상정원이 대두된 현상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공간 확장과 더불어 정원일(gardening) 또는 정원행태의 회복도 필요한 시점이다. 공공성에서의 조경이 아닌 일상에서의 조경이 필요한 것이다.
정원과 공원을 상대적인 개념으로만 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며 사유성과 공공성의 대립으로 보는 것도 과도한 비약일 수 있다. 그렇지만 개인성이 강한 정원을 이용자와 무관한 제3자가 보급하는 것은 그것이 일부라도 다소 아쉬움이 남는 방식이다. 일말의 가치 환기는 있지만 태생이 불만인 것이다. 2012년 경기도에서는 제1회 경기정원문화박람회를 업그레이드하여 도시농업 및 정원문화박람회를 개최한다. 도시농업을 활성화하고 옥상정원과 같은 정원문화를 장착시키기 위한 시도이다. 일반인이 많이 참가하여 시민정원의 비율이 높아지길 희망해본다. 자신이 평소에 가꾸던 정원을 다른 사람에게 뽐내거나 ‘조경가 보고 있나?’ 라는 다소 도전적인 마인드의 참가자가 많이 있기를 희망해 본다. 정원이 더 이상 멋진 단독주택을 가진 사람들만의 전유물이 아님을 보여줄 때가 됐다. 세계를 여행한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해외에서 중국정원과 일본정원은 볼 수 있지만 한국정원은 볼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는 한국정원이 갖춰야 할 전통적인 덕목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정원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노력이 우선일 것이다. 보여주기 식의 정원을 지양하고 개인적이고 사유적인 차원에서 시작된 정원만들기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그런 태도는 경계를 넘어 공공의 영역으로 확산될 것이고 조경은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경기정원문화박람회는 유익한 결과들을 선보였다. 땅콩집 마당, 개인 옥상정원, 개개인의 정원이 공모에 접수되었다. 수상작들은 일반인에게 정원나들이의 형태로 공개되고 정원주가 정원의 노하우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조경가들이 하지 못한 일상적인 정원꿈꾸기가 시작된 것이다. 정원 공간이 사유지의 형태이지만 도시의 이벤트 요소로써 반사유성(Semi-Private)을 갖게 됐을 때 도시에서 발휘하는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공공성으로 나아가는 느슨한 경계를 향한 발걸음이다. 정원박람회의 정원들이 이런 스토리를 갖고 생겨났을 때 본래 추구하고자 했던 도시의 정원화, 정원도시 등의 비전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정원에 대한 관심을 구시대적으로 보거나 단지 전통적인 역사에 대한 관심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 정원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그것이 공원화 되는 과정을 되짚어 봄으로써 공공성의 공원이 잊고 있던 일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한국정원과 세계의 정원, 한국의 공원과 세계의 공원이 어떻게 변모하고 서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본다면 더 나은 해법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학문적 고찰이전에 개인의 주변에 머물고 있는 공간에 대한 일상성의 회복에 더 큰 해답이 있을 것이다. 공원이 갖는 공공성의 경관과 정원이 갖는 사유성의 경관의 경계에 사람이 있고 새로운 답이 있다. 이것은 공공미술, 인문학 등 통섭을 이야기하는 현시대에서 공통분모를 가질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도시와의 조우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조우하고 결합될 것인가. 공원의 정원화와 정원의 공원화는 분명 다른 의미를 내포할 것이다. 공공의 공원은 지금까지 나름의 노력을 통해 꾸준히 더 구체적인 개인적 차원으로 내려오고 있다. 구제적인 목표와 대상을 갖기 시작했다. 반면 사유성 혹은 반공공성을 지닌 정원은 아직 그 기반 자체도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의 발전을 기다릴 필요가 있다. 조경이 도시공간에서 공공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무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조경이 만들어내는 그 공간조차도 항상 공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공원에 꼭 다수 모두가 참여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들어갈 수 없는 반사유적인(Semi-private) 정원들도 도시 내에서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 나에겐 허락되지 않지만 그들의 공공성(Semi-public)을 위해서 기능하는 것이다. 조경공간이 반드시 모든 다양한 계층의 요구를 들어줄 당위는 없다. 주민참여디자인이 그들 모두가 원하는 디자인을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도시의 공공성을 위해서 공원에서 밭을 가꾸고 채소를 키우며 도시농업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실제로 그것이 효율적으로 진행된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주체가 없다는 것은 모두의 공간임을 의미한다. 모두의 공간이란 것은 성격이 없다는 것이고 매력이 없음을 말한다. 그러한 공공의 공간은 더 이상 도시에서 숨 쉬지 않는다. 우리 주위에는 활성화되지 않은 채로 잠자고 있는 공원이나 공공공간이 무수히 많다. 이들이 어떤 장소성을 가져야 할지 묻는다면 그 답은 사람들의 일상성에 있다. 일상적인 참여가 이루어진다면 공간은 생기를 갖는다. 그러나 그 일상성이 의미 없는 주변화를 의미하진 않는다. 소형공원이 갖는 혹은 정원문화가 갖는 일상적인 행태로부터 일어나는 가치를 의미한다. 도시 내 소공원이나 근린공원의 활성화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 서소문 근린공원을 들 수 있다. 서소문 근린공원은 서울시에서 잘 이용되지 않는 대표적인 공원 중 하나이다. 서울역과 인접하고 있고 숭례문과는 500m 거리, 시청과는 800m 거리에 위치한다. 천주교와 관련되는 역사가 있는 곳이고 순교자들의 현양탑이 있다. 그리고 인근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성당인 약현성당이 있지만 이런 것과 관련되는 일상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공원은 모든 공공을 위한 공간으로 남아있으면서 결국에는 아무도 찾지 않은 공원으로 남겨진 것이다. 확실한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조경의 상향화(bottom-up)와 관계한다. 누구를 참여시킬 것인가의 물음을 던져야 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행태로부터 공간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적이지만 공공적이기도 한 공간의 소형화 또는 정원화의 과정에서 도시와 조경은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공원과 정원의 정의와 기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각각의 것을 하나의 공간적인 사례로 들었지만 그 본질은 물리적인 형태나 그 규모에 있지 않다. 본질은 그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이 개인적 차원에서 관계를 맺은 공간과의 만남에 있기 때문이다. 정원, 공공, 민간, 주택, 행태, 조경, 공공성, 사유성 등의 다양한 단어들을 이야기 했지만 스티브 잡스의 연설문에 나온 글귀처럼 ‘connecting the dots’를 외치며 글을 마무리해야할 것 같다. Public Landscape와 Private Landscape의 접점에서 발견한 Semi-P Place는 두 가지 다른 방향에서 시작된 흐름이 사람이라는 대상적 가치로써 하나로 만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정원이 최초에 생겨나게 된 배경과도 연관된다. 역사적으로 정원은 인간 본연의 사적영역을 설정하는 공간으로 일반대중보다는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설계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한 이 공간은 19세기 옴스테드가 도시공원과 관련하여 단어를 정의한 public garden, place, place park, public place, parkway등의 여러 단어로도 설명가능하다. 각각의 공간이 가지는 의미 분화는 조경공간에 관련한 녹지, 분수, 시설 등의 비중보다는 어떤 활동이 일어나는가와 관련 깊다. 조금 더 세분화하여 Semi-Public과 Semi-Private의 접점에 있는 이 공간의 성격을 사람이라는 일상적 가치를 바탕으로 극대화하면 할수록 아마도 각각의 경관이 지닌 경계(景`界)는 느슨해 질 것이다. 느슨해진 결합은 더 많은 가치를 담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전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하려는 메타담론보다는 개인의 가치에서 시작한 공공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공원을 만들어 갈 때 도시의 하루가 더 풍요로워 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