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사,  합리주의

왜?

“Why, why, why” 구자철 선수의 외침이 기억난다. 런던올림픽 한일전에서 그는 자신에게 엘로우 카드를 준 심판에게 달려들며 수차례 ‘와이’를 연발했다. 그는 몹시 화가 났지만 심판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몇 번 더 말을 했다간 아마 퇴장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친구 중 한 명은 자신이 지루할 때쯤 구자철 선수를 따라한다. “밥 먹으러 가자”, “와이”. “집에 가자”, “와이”, “왜왜왜왜왜?” 여자면 귀엽게 봐줄 만도 한데 남자가 이러면 당장 퇴장시키고 싶은 본능이 솟아오른다.

어렸을 때는 호기심이 많았다. 왜 그래야만 하는지 몇 번을 물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합당해야만 난 행동으로 옮겼다. ‘왜’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유가 궁금했다. 이것은 반항의 차원이기보다 이해의 차원이었다. 교실에서 청소시간에 책상을 모두 뒤로 밀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왜 그래야하냐고 여쭈기도 했다. 답은 청소의 효율성을 위함이었다. 10살 때는 담임선생님의 돈을 훔친 용의자가 돼 자체 수사를 받다가 “왜 내가 의심을 받는지 증거를 대라”고 한 적도 있다. ‘경찰청사람들’을 보고 배운 말이었는데 이후 꼼짝없이 누명을 쓰게 됐다. 답은 내가 교실에 제일 먼저 왔기 때문이었다.

‘왜’에 대한 강박은 독단으로 흐르기도 했다. 여행지에서 들어가지 말라는 곳에 들어가고, 수업에서 현장답사를 다닐 때는 담을 넘기도 했다. 호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납득하지 않은 것이다. 스무살에 무전여행을 할 때는 수많은 법을 어겼다. ‘왜 내가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누군가에게 묻지도 않고,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합리화했다. 객관성이 철저히 결여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왜’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인이 된 지금 나는 여전히 ‘왜냐며’ 묻는다. 대답이 없으면 실행하지 않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대답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관성이 더욱 짙어진 것이다. 이는 소통의 문제로 확대된다. 나의 기대를 채우지 못하면 불통을 선언하는 것이다. 대단히 이기적이다. 이렇게 ‘왜’를 필요로 하면 할수록 고집, 독단, 불통은 늘어만 갔다. 이렇게 점차 싹수가 없어졌다. ‘why’가 없다는 이유로 나의 ‘싸가지’도 없어진 것이다. 이것이 내게 없는 ‘4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계속 물을 것이다. 나의 ‘4가지’는 계속 될 것이다. 다만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해 고집, 독단, 불통 위에 이해를 놓으려 한다. 설득이 아니고 이해다. 이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을 말한다. 나의 이유가 중요한 만큼 상대의 것도 중요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해는 꽤나 큰 친절을 필요로 한다. 마치 어린 아이에게 대답하는 것과 같다. 친절한 이유가 가미된다면 고집은 신념으로, 불통은 소통으로 나의 싹수가 자라나지 않을까.

관료화된 사회에서 지시는 상명하달의 경우가 많다. 시키면 시킨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이유는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야”, “하라면 좀 해라” 등 1차원적인 대답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합당한 이유가 없으면 그것은 폭력이다. 싸가지다. 친절을 가미해 이유를 말해주는 문화가 확산되면 좋겠다. 삶은 스포츠와 다르다. 레드카드를 꺼내기 전에 조금만 여유를 갖는다면 조금 덜 불편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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