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101
국내 대중문화에서 정식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은 슈퍼스타K가 최초였다. 반향이 무척 좋았다. 유명인이 아닌 일반인이 출연하는 것도 영향이 컸다.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그들의 도전에 공감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사 프로그램들이 연이어 편성됐다. 종방이 된 것도 있지만 K팝스타처럼 꾸준히 롱런하는 것도 있다. ‘오디션’으로 설명할 수 있던 이런 기획은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노래 프로그램으로 번지기도 했다. ‘나가수’, ‘복면가왕’, ‘히든싱어’ 등이 그 예다.
타인의 경쟁을 탐미하는 구경꾼의 문화가 점점 증폭했다. 이는 차츰 노래를 넘어 패션·모델, 미용, 조리, 레이싱, 두뇌게임 등 경쟁이 가능한 모든 종목으로 확장했다. 누군가는 도전을 하고 누군가는 평가를 하는 것이다. 대중의 참여정도도 높아졌다. 이제 대중은 기꺼이 인터넷과 휴대폰을 이용해 참여한다.
‘프로듀스101’이 상당히 거북했다. ‘경쟁’의 판을 벌이고 이를 파는 저열한 소비문화의 정점이라는 생각이었다. 갈 데까지 갔다는 의미다. 101명의 걸그룹 연습생. 그들을 상자에 가두고 움직이게 하고 싸우게 하는 것. 우리사회에서 지금 마침 가능한 일이다.
물론 부정할 수 없는 많은 진리들이 이 안에 있다. 방송은 구경꾼을 양산해야 돈을 번다는 것. 그래서 판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 이 세상은 경쟁으로 이뤄진다는 것. 도태된 자는 낙오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 우리는 현실을 수긍하며 그 문화를 소비한다. 그렇게 자연스레 우리는 평가자의 자리에 위치한다. 아니 사실 우린 그 자리에 욕망을 가진 문화의 주체다.
‘프로듀스101’은 노골적으로 시청자를 타깃으로 한다. 국민이 프로듀서가 된다는 설정이다. 첫 번째 곡 ‘Pick me’를 통해 적극적인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낸 방송이다. 이제 국민은 어떤 평가자가 될까.
‘준비도 안 된 애가 왜 나왔지’라며 노래를 못하면 낙오시킬 것이다. ‘저렇게 생겨서 걸그룹 할 수 있을까’라며 못나게 보여도 낙오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 행동 하나하나가 ‘인성’이라는 거룩한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도 철저히 낙오시킬 것이다. 대중들은 그런 문화 안에 있다. 그리고 방송은 그 대상이 누군지 우리에게 보여줄 준비가 됐다.
오늘 우연히 1~3회분 연속방송을 시청했다. 이따위 방송에 대한 다짐과 다르게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참가자를 고르게 됐다. 예쁘고 노래도 잘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다 외웠다. 그리고 엠넷 홈페이지에서 투표를 하려고 로그인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회원가입까진 하지 않았다.
101명이 무대에 올라 춤추는 것은 다소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방송으로 한 명씩 클로즈업이 되니 각자의 인생에 관심이 생겼고 응원하게 됐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말을 할지 모른다. 처음엔 비판적으로 봤지만 막상 보니 괜찮았다고.
그런데 사실 괜찮게 보이는 진짜 이유.
그것은 우리가 이미 “이런” 대중문화에 너무나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