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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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 신루
사실 우리들은 서로 알고 있었다. 그때의 현재에 충실했던 것일 뿐. 인연이라 말했던 수많은 관계들의 무너짐. 외곽에 맴돌다 사라지는 사람들의 모습들. 함께한 많은 이름은 어느 순간 사람들이란 집단 속에 자리하고. 이내 곧 흩날리는 조각이 되어 봄이 지나는 꽃잎처럼 사라진다. 여느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고. 오늘 헤어짐이 영원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묻어두고. 지금과 영원히 마주하지 못할 운명을 체념한다. 실제로 삶의 끝이 그러한 것을 우리가 알듯이. 우리의 조각들도 그러하다. 사실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그때의 현재에 충실했던 것일 뿐. .. 나는 우리의 이어짐이 작은 유리틈 사이로 덧없이 빠져가는 모래처럼 흩어지길 바라지 않았다 .. 적어도 나는 그러했다 .. 시간이 지나도 …… – 연(緣)의 신루(蜃樓) 201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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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하나 그리고 서른
스물 한 살 때인가, 오늘보다 조금 더 포근한 날씨에 춘천으로 가는 열차에서 창가에 앉은 그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놀 수 있는 게,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몰라’ 나는 당시 그 의미를 체감하지 못했고, 어쩌면 지금도 전부 이해못했을 수 있다. 사실 스물 하나인 아이치고는 철이 든 생각이었을 수 있지만 지나고보니 정확하게 맞는 말이었다. 오늘 그 한마디가 들리는 듯 그 말에 담긴 모든 감정들이 소중하게 생각되는 날이다. – 스물 하나 그리고 서른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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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에
군입대 후 집에 돌아오니 그사이 집에서 내 짐들을 정리했는데 창고에 넣어뒀던 그것을 고물상에 팔아버렸다 만원이나 받았을까 버릴 수도 있었던 것을 구태여 집으로 가져온 건데 엄마는 참 로맨스가 없었다 스물이 꾸미는 시절동안 그보다 훌륭한 선물은 없었다 어쩜 그리 좋았을까 지금의 내마음엔 그 투박한 먼지쌓인 물건마저도 없어 오래전의 문을 슬며시 열어보았다 – 그즈음에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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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아무 말 없어도 우리 서로 알아줄 수 있는 사람 그냥 편안히 말없이 마주 앉아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 바라만 보아도 행복해지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 숨김 없이 다 말해버리고는 나중에 후회하는 사람 나보다 더 정이 많은 사람 나보다 더 배려가 깊은 사람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어느새 가슴이 뛰어 버리는 그런 사람 나의 진심어린 마음을 이끌어 내는 사람 그렇게 미친듯이 나를 변화시키는 사람 착한 순수와 순결한 외로움을 지닌 사람 나를 찾아주고 일으켜 세워 주는 고마운 사람 자신을 아무도 모르게 희생하고 배려해온 그런 사람 왜 그렇게 잘난 사람 그래서 차마 알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은 사람 –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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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을 지나 어른에 다다라
서른을 지나 어른에 다다라 사랑에서 나를 좀 더 아프게 했어야 했다는 마음이다. 좀 더 많이 실패했어야 했고 알 수 없는 벽에 더 세게 부딪혔어야 했다. 심장의 울림을 더 뜨겁게 하여 밖으로 내보내 그대로의 감정과 현실을 좀 더 사랑했어야 했다. 나의 심장에게 열어주지 않은 호소 가로막았던 두려움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렇게 마른 마음으로 시든 것은 아닐까 현실과 현재에 타협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어른이 두려울 지도 모른다. – 서른을 지나 어른에 다다라 2014-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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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운이 만연한 어느밤
인생이란 나의 작은 스케치북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나 간단히 그린 사람들의 얼굴들 그리고 그 가운데 나를 그렸다 찬공기가 스치며 하는 얘기를 듣지 못하여 하얀 입김을 내쉬며 걸었다 그리고 “그냥 …” 이라고 말했다 공허한 자조적인 웃음과 탄식의 단어 술기운이 만연한 어느 스물 여덟의 밤에 확실해 진 것은 그것이었다 너라는 이름 뿐이었다 2011.03.26 pic by vhm_al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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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
발걸음의 차이였다 부단히 그것을 좁히려 했다 열정의 비결이었다 앞에 보이는데도 그 말한마디 건네기 위한 간격이 좁혀지지 않았다 소리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무능력의 소치 발걸음을 믿었던 자만도 역시 뛰어야겠다는 마음은 7년 전 해방되면 꿈처럼 달리려고 했지만 내 안의 호소에 그쳤고 곁으로 따라잡아야겠다는 다짐은 기껏 부를 수 있는 거리로 멀어졌고 곧 신기루처럼 흐려졌다. 정지했다 이 발걸음은 어떤 욕欲에 기댄 것이기보다 아이가 엄마를 향해 뛰어가는 일종의 그런 마음이었다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소리를 쳤을까 조금만 천천히 가달라고 말을 했을까 때로 그들이 뒤를 돌아봤던 순간 정작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다 이유는 모른다 이것은 대화의 문제였다기보다 발걸음의 문제였기 때문에 어쩌면 그역시도 신기루일테니까 한 번쯤은 손짓을 하고 잠깐이라도 그 간격안에 있으려고 한두번은 멈춰주길 바랬다 뒤돌아보지 않는 흐릿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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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은
보고싶다는 것은 말하는 모습과 웃는 모습과 화내는 모습 당황하는 모습까지 걷는 모습과 인사하는 모습 앉아있는 모습과 서 있는 그 모든 여름의 모습과 겨울의 모습까지 그렇게 내가 기억하는 모습 … 좋다는 것은 걷기가 이야기 나누기가 커피 마시기가 목소리 듣기가 찾아헤매기가 마주 앉아있기가 물끄러미 보기가 같은 차를 타기가 그렇게 다가가기가 … 싫다는 것은 오해와 흐르는 시간과 장애와 흐르는 시간과 덩그런 나의 모습 흐르는 시간들과 흘러간 시간들 집착과 심오하고 무거워진 곡해의 마음 덩그러니 남은 미안함까지도 그렇게 어긋나는 … 바라는 것은 그저 … 그냥 … 그렇게 … – 그런 것은 2011.03.01